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제남 사건 (문단 편집) === 교섭의 진행과 혁명군 주력의 철수 === 5월 3일부터 시작된 시가전은 계속 이어져 5월 5일에야 겨우 그칠 수 있었다. 일본군은 국민혁명군이 300명의 일본인을 눈알을 도려내고 돌을 채워 죽였다고 주장했는데 실제론 13명이 죽고 28명이 실종된 수준이었다. 장제스는 장제스대로 일본인이 1천명의 중국인을 죽였다고 주장했지만 실제론 100명 수준으로 보인다. 장제스는 일본인들은 필설로 다할 수 없이 사악하고 압제적이라고 저주하며 괴롭힘과 능욕을 일삼는 자들에게 굴복할 수 없다고 이를 갈았지만 힘의 부족과 일본이 무력을 사용할 것을 주저하지 않을 것이란 것을 인정해야 했고 영국과 미국 영사들이 중재에 나서자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5월 4일 새벽 일본군은 장쭝창의 군대가 지난에서 북북동 방양으로 100킬로미터 떨어진 덕주에 있단 정보를 입수하고 전보를 보내 장쭝창에게 지난으로 돌아올 것을 요청했으나 장쭝창은 장제스에게 너무 큰 타격을 입은 상황이라 1, 2개 연대 정도의 여유도 없어서 그 요청을 따를 수 없었다. 이에 일본군은 전투기를 띄워 장제스의 혁명군 총사령부를 공격했고 호위병 몇명이 사망하고 장교 수명이 부상당했다. 장제스는 사태가 화북 전역으로 퍼지는 것을 막기 위해 계속 교섭단을 파견했고 4일 오후에 일본군은 갑자기 태도가 누그러져서 "어제 부하병사가 일으킨 충돌은 오해로 인한 것이었다. 우리는 이후 절대로 사건을 확대할 생각이 없고 어떻게 해서든 조정하고 싶으니 장총사령도 오해가 없도록 해주기 바란다. 후쿠다 사령관은 혁명군에 대해 호의를 가지고 있으며 중국혁명군을 원조하고 싶다고 말하고 있다."고 고위참모를 보내 전해 왔다. 이에 장제스는 "쌍방의 부하들이 일으킨 충돌사건을 시끄럽게 만들지 않는 편이 좋다. 따라서 사건을 확대시키지 않겠다는 생각에 찬성한다. 오늘은 단지 당신들 일본군 병사가 이후에 발포를 계속하는지 않는지를 지켜보겠다. 나는 그것으로써 일본군의 성의유무를 판단하고자 한다."고 화답했다. 이에 일본군 대표는 발포 정지를 약속하고 물러섰으나 일본군은 서문, 북문 일대에서 공격을 총격, 포격을 멈추지 않았다. 이에 장제스는 일본군의 태도 완화는 그저 병력을 모으기 위한 책략으로 여기게 되었고 실제로 일본 육군 참모본부는 후쿠다에게 "내지로부터 충분히 증병될 터이므로 단호한 조치로 나가라"고 지령하는 한편 개 사단, 1개 철도대를 본토에서, 만주에서 1개 혼성여단을, 조선에서 1개 비행중대를 급파할 것을 결정했으나 의회 내부의 반대로 다나카 기이치 수상은 이를 쉽사리 승인하지 못하고 정식 결정을 8일로 미룬 상태였다. 5월 4일 밤 장제스는 일본군과의 충돌을 피하기 위해 지난 성 바깥의 혁명군에데 황하를 도하해 북방으로 진군할 것을 명령했다. 다만 이때까지 장제스 자신은 일본군이 북상하는 혁명군의 후방을 공격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지난에 머물며 교섭을 계속했다. 5월 5일 오후 2시 장제스는 새로운 교섭단을 파견하여 니시다 총영사대리 및 쿠로다 참모장과 협상했는데 장제스는 후쿠다 사단장에게 평화를 위해 일본군이 점령한 지역에서 부대를 철수하겠으며 일부 부대를 지난에 남겨두고 자신과 국민혁명군 총사령부는 하남을 건너 북진할테니 일본군의 군사행동을 중지해줄 것을 요청했다. 쿠로다는 외성에 거주하는 일본인 거류민을 보호하기 위해 무장한 일본 헌병이 일본인 거주지에 들어가게 할 것과 개항장의 치안유지를 일본군에게 맡길 것을 제안했다. 이에 대해 장제스의 위임장을 가진 공식적 대표와만 협상하겠다고 함으로 교섭이 이루어지진 못했다. 오후에 중국군 주력부대가 이미 황하를 도하했다는 것을 알아차린 일본군은 항공기와 대포를 동원해 습격을 감행했고 이에 혁명군은 상당한 피해를 입었다. 하지만 5일 밤 장제스는 4개 대대만 남기고 모든 병력을 도하하게 했다. 일본군은 이를 저지하기 위해 북관과 서관에 병력을 배치하고 포위망을 형성했으나 6일 새벽에 모든 병력이 철수하는데 성공했다. 병력이 모두 철수했다는 보고를 받은 장제스는 일각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이연년이 지휘하는 1개 보병단과 소종철이 지휘하는 일부 병력을 합쳐 3천명 정도만 남기고 자기 자신도 지난을 떠나기로 하였다. 이때 장제스는 이연년에게 "적어도 이틀 이상은 버텨주기 바란다. 일본군은 반드시 정면으로 공격을 감행해 올테니까 그때에는 소종철의 부대와 함께 태안 방면으로 철수해도 좋다. 자네들을 위해 여기에 무전기 1대를 두고 갈 테니까 수시로 나와 직접 연락하고 명령을 들어주기 바란다."고 지시했다. 장제스는 지난에서 17킬로미터 덜어진 당가장으로 옮기기로 결정, 동시에 후쿠다에게 편지를 보내 어젯밤에 이미 혁명군이 도하를 끝냈으니 일본군이 더 이상 공격할 이유가 없을 것이라며 공격을 중지해 줄 것을 요청하고 6일 오전 8시에 남문을 통해 지난을 빠져나왔다. 오전 10시, 장제스가 지난을 빠져나간 것을 안 일본군은 크게 당황했고 후쿠다는 "이제부터가 성가시게 되었다. 그렇다 하더라도 이젠 손을 쓸 방법이 없지 않은가!"라고 실망을 드러냈다. 한편 장제스는 지난을 떠난 6일 펑위샹과 북벌에 대해 협의했다. 이 협의에서 장제스는 북벌에 전념하고 펑위샹이 일본 문제를 해결하기로 합의를 본 것으로 보인다. 이에 펑위샹은 교섭단을 보내 일본과 교섭을 했으나 아무런 소득이 없었다. 한편 국민혁명군이 지난에서 일본군과 교전했단 소식이 중국 각지에 퍼지면서 상하이, 광저우, 우한 등지에선 반일 시위가 이어졌고 국민혁명군 사령관인 장제스는 항일 영웅으로 곳곳에서 칭송되고 있었다. 일본군은 장제스가 빠져나갔다는 것을 알자 6일밤부터 총공격에 들어갔다. 장제스는 일본군이 총공격에 돌입했다는 것을 알자 이연년에게 철수해도 좋다고 했으나 이미 일본군에게 포위된 상태라 빠져나갈 수가 없었다. 하지만 이연년은 9일까지 무려 4일을 저항하며 일본군을 저지하는데 성공하게 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